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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 세력 구분 방법 및 붕당의 역사(ft. 붕당 뜻, 노론 소론 차이)

_수_ 2023. 4. 28.

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붕당정치라고 하여 동인, 서인, 남인, 북인등 동서남북으로 패를 갈라 싸웠으며, 또 노론, 소론등 뭐하는 애들인지 모를 애들이 편먹고 싸움을 계속한다. 오늘은 이러한 붕당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시대별로 어떻게 불렸는지 알아보자.

 

붕당 세력 종류와 역사

 

1. 신진사대부

 

고려말기의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던 집단으로, 조선 건국의 주축이 된 세력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도전이 있다.

 

2. 관학파

 

조선 초기 조선을 주도한 세력으로 신진사대부의 후신이다. 시대에 따라 이방원 계열, 박포계열 이후엔 친김종서파, 반김종서파등이 있었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계유정난을 기점으로 관학파는 몰락하고 훈구파와 사림이 등장한다.

 

3. 훈구파 VS 사림파

 

  훈구파는 계유정난의 주축이 된 세력들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있다. 훈구파는 절대적 왕권을 숭상하는 왕당파였으나 사림파는 왕이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내가 왕이될 상인가? - 세조역의 이정재

  훈구파의 세력이 커지자 성종은 재야의 고수들인 사림파를 밀어주기 시작했는데, 사림파는 이후 4번의 사화(사림파들이 썰려나간 사건들)를 겪고도 결국 훈구파를 몰아내고 정국을 장악한다. 훈구파는 명종시대에 사림이 늘어나면서 사림파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거나 사라졌다.

 

 

4. 동인 VS 서인

 

  선조시대에 인재추천권등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동서가 나뉘어졌다. 동인의 주축이던 김효원의 집이 동쪽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은 서쪽 정릉방에 있다고 서인이라 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에서 동인이 먼저 몰락하였는데, 이유는 동인이던 정여립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서인이었던 '정철'이 동인과 정여립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남인의 수장 류성룡

  이후 서인이었던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빨리 세자로 세우자고 선조에게 건의했다가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된다.(건저 사건) 이때 선조는 나이가 더 어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신평군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정철의 처리를 강경하게 주장하던 세력이 북인, 정철의 처리를 온건하게 주장하던 세력은 남인으로 분열된다.

 

  북인은 당시 영의정이던 이산해를 영수로 하였고, 남인은 당시 우의정이던 유성룡이 주축이었다. 참고로 서인의 주축이던 정철은 좌의정이었다.

 

 

5. 남인 VS 북인

 

  선조시절 정철의 건저사건 이후, 서인은 사라진 것은 아니고 세력이 약화된다. 동인이었던 남인과 북인이 득세하는데, 남인이었던 유성룡이 일본과 화의를 제안하였다가 좌천되고, 이후 북인이 득세하게 된다.

 

 

6. 소북 vs 대북

 

  뭐 조금만 기미만 있으면 자기 주변으로 세력을 모으려고하는게 붕당의 특징인데, 선조 32년, 이조판서 '이기'가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추천하자 이에 반대하는 인물이 나왔는데, 홍여순을 지지하는 세력은 정인홍을 중심으로 대북이 되고, 홍여순을 비판한 유영경을 중심으로 소북이 형성된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 북인과 남인은 동인 출신이다)

영화 광해의 이병헌

  대북과 소북은 선조의 후계자리를 두고도 다투었는데,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였고, 소북은 선조가 뒤늦게 새로 들인 왕비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지지하였다. (선조의 원래 왕비에게선 자식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14남 12녀를 두었다. 하지만 건강했던? 선조는 51세에 19세의 후궁을 들여 영창대군을 낳는다.)

 

  아시다시피, 광해군이 선조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대북이 득세하게 된다.

 

 

7. 서인 VS 남인(동인)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대북과 소북은 모두 몰락한다. 이후 서인과 남인이 득세하게 된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동인이 '정철'의 처분을 두고 온건파는 남인, 강경파는 북인으로 갈라졌었다. 이후 일본과 화해를 주장하던 남인측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북인이 득세하게 된다. 정권을 잡으면 갈라지는게 붕당의 특성인지라, 북인들은 광해군을 지지하는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지에 따라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힘을 얻게된 남인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남인의 수장 허적의 초상

 이후의 붕당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게 된다. 경신 환국은 남인들이 대거 실각한 사건인데, 갑인년 예송논쟁(현종 15년, 상복 몇년 입을지에 대한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의 수장 '허적'이 왕실의 유악(기름 칠해진 천막)을 허락없이 빌려가면서 남인에게 집중된 권력을 숙종이 와해시킨 사건이다.

 

 

8. 노론 VS 소론 VS 남인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약화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다. 노론은 남인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세력이고, 소론은 온건한 처벌을 주장한 세력이다.

 

  과거 선조시대때 서인이었던 정철의 처분을 두고 강경 처분을 주장했던 동인은 북인이 되고, 온건 처분을 주장했던 동인은 남인이 되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이다.

 

  숙종시기부터 정조대까지 노론과 소론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며 정권을 잡는다.

 

 

9. 시파 VS 벽파

 

  시파와 벽파는 노론, 소론, 남인이 섞여있다. 시파의 경우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주자는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로, 주로 소론과 남인으로 이루어졌으며, 몇몇 노론도 함께 섞여있었다. 벽파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벽파가 되었다.

정조의 상상 어진

  시파와 벽파는 원래 정조초기 정국을 주도하던 소론의 서명선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궁한 처지라 하여 '벽파'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서명선에 동의하는 무리를 시류에 편승하는 시파라고 하였다고 한다.

 

 

10. 세도정치기

 

  정조가 사망후, 벽파와 시파는 서로 잠시 정국을 주도하다, 정조의 둘째아들인 순조의 장인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정국을 주도하며,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김조순

  조선후기의 세도정치는 왕의 외척인 신 안동 김씨들에 의한 독점적인 정치형태였다. 붕당은 서로 물고뜯고 싸우기는 하지만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도 했었지만, 세도 정치는 서로에 대한 견제 없이 신안동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등이 자신들 뜻대로 헤쳐먹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이 세도정치는 '상가집 개'로 불리며 자신을 낮추어 속이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끝이 난다.

  

 


  여기까지가 조선의 붕당의 종류와 역사였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세조를 지지하던 훈구파와 왕도정치를 주장하던 사림파.

그리고 성종이 사림을 밀어주며, 훈구파가 사림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이후 선조시대에 사림은 인사권한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졌고,

이후 동인은 <건저사건>으로 선조의 눈밖에 난 '정철'의 처리를 두고 남인 북인으로 나뉜다.

남인은 수장이었던 류성룡이 일본과 화의를 제안하면서 좌천되었고,

이후 북인은 <대사헌>에 추천된 '홍여순'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북, 반대하는 세력이 소북이 된다.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 하였고, 소북은 선조의 늦둥이 영창대군을 지지한다.

하지만 둘다 인조반정 이후 소멸하였고,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그리고 서인이 다시 득세한다.

이후 정조시대에 사조세자 추존에 반대하는 세력은 시류에 편승하다 하여 '시파', 그리고 그 반대 세력은 처지가 궁벽하다 하여 '벽파'라고 부르게 된다.

이후, 정조 사망후 순조의 장인인 안동김씨 김조순에 의해 세도정치 기간이 시작되고

순조, 헌종, 철종의 세도통치 기간을 지나, 고종시대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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